삶으로서의 예배: 롬12:1-2
김 종 철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1장부터 11장까지로서 기독교의 교리에 관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아주 논리 정연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12장부터 마지막까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주 실제적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서 전체의 구조 가운데 오늘의 본문은 로마서의 두 번째 부분(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부분) 전체에 대한 서문의 역할을 하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12장 1절을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므로’라는 말은 의미심장한 접속사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단지 머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지난주 기독로펌의 지향점과 이상 그리고 성경적인 입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러므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즉 실천적인 부분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다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노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의 교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었습니까? 로마서의 앞 부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실 정도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크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크신 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 크신 자비하심을 먼저 11장에 걸쳐 설명한 다음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순서는 신, 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윤리와 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출애굽 시켰으니 너희들은 나의 계명을 지켜라”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순서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를 봐도 한슬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주면서 “아이스크림 줬으니 시사 시간에 얌전히 있어라”라고 하기 보다, “오늘 식사시간에 말 잘 들으면 아이스크림 줄 께”라고 하는 말이 치사한 줄 알면서도 더 하기 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슬이가 아이스크림만 먹고 식사시간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억지로 우리의 순종을 쥐어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중심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그런 모습을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와 은혜가 먼저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다음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이렇게 살았으니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자비와 은혜에 감동해서 그 응답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 은혜에 빠져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감격이 날마다 새로워져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적인 삶을 살기란 힘이 듭니다.
바울은 12장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부분의 서문에 해당하는 이 구절에서 과연 뭐라고 권합니까? 1절 뒷 부분을 보십시오. 바울은 ‘진정한 예배를 드려라’라고 합니다. 개역 한글판에는 ‘영적 예배’라고 하고 있는데, 이 ‘영적 예배logikos’의 해석과 관련해서는 학자들의 다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spiritual영적인’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rational합리적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reasonable 진정한, 마땅한’으로 해석합니다. 저는 공동번역에 따라 ‘진정한 예배’라고 보는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장부터 11장을 읽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와! 이렇게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가 크시다니, 우리가 송아지라도 잡아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념하고 감사를 표시해야 하지 않을까? 동물을 잡아서라도 예배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의 제사와 같이 동물을 잡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념하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야! 진정한 예배는 바로 이런 거야.”
그렇다면 진정한 예배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1절 중간부터 하나님의 자비하심에대한 마땅한 응답인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정의합니다. 진정한 예배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정한 예배는 구약의 제사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이렇게 비교해서 살펴보면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제사의 시간과 장소가 다릅니다. 구약의 제사는 정해진 장소에서 일정한 절기에 드리면 족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장소와 시간의 구분 없이, 모든 곳에서 특히 세상에서 매순간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2절에서 바울이 ‘세상’을 언급하고 있고, 계속, 반복의 의미를 가지는 동사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이 점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교회 안에서 주일날만 이루어지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중에도 세상에서 흩어지는 교회로 살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려고 해야 합니다. 지난주 기독로펌에 대한 논의에서 발제자가 “지속가능한 공익활동을 하는 수익적 로펌”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로 “변호사 사무실에서의 일 자체가 사역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것입니다.
둘째, 제사의 주체가 다릅니다. 구약의 제사는 제사장만이 드릴 권한과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예배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 앞에서 ‘형제들아’라고 호칭한 후, 중간쯤 가서 진정한 예배의 주체를 말하면서 ‘너희’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예배’는 목사나 간사나 특정한 부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이러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법조인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세째, 제사의 목적물, 즉 제물이 다릅니다. 구약의 제사는 동물을 죽여서 조각을 내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동물이 아닌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고, 죽여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산 채로 드리는 것이고, 조각을 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 삶의 모든 영역을 통째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6장 1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몸을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이 없이...오히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즉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존스토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의 몸 하나 하나가 악의 도구가 되어 롬3:13이하처럼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남을 잘 속이고), 혀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은 독사의 독이 흐르고, 발은 피흘리는데 날쌔고,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발은 그분의 길을 걸어야 하며, 우리의 입술은 진리와 복음을 말해야 하며, 우리의 목구멍에서는 다른 이의 상처를 싸 매주는 말이 나와야 하고, 우리의 손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야하고, 우리의 팔로는 외롭고 사랑받지 못하는 자들을 감싸않아야 하고, 우리의 귀는 비통해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야 하고, 우리의 눈은 겸손하게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네째,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의 기준이 다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제사가 되기 위해서는 제물인 동물에 흠이 없어야 합니다(레1:3). 그러나 진정한 예배의 경우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은 이 점에 대해 2절에서 적극적인 의미와 소극적인 의미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1)소극적인 의미로 거룩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본받지(conform) 말아야 합니다. 앞에서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세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거슬려 살지 못하고 세상의 풍조에 따라 살 때, 우리의 삶은 전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제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처럼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적극적인 의미에서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야(transformed) 합니다. 즉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형식만 갖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 즉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좇아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세계관이 성경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에서도 바울은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난 주 기독로펌에 관한 논의에서 기독로펌을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대안적인 공익 로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소극적으로 ‘세상을 본받지 말고’ 적극적으로 ‘새 사람이 되라’라고 말하면서 계속적인 의미를 가진 동사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본 받지 않고 새 사람이 되는 일은 주님 우시기 전까지 쉼 없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과신하여 이 일을 멈추는 순간 어느새 이 세상의 문화에 물들어 있는 모습, 옛사람이 활기 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세상을 본받는 것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변화를 받는 것 사이에 중립은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좇아-2절 후반부에서 그것은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온전한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생각이 바뀌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돈에 관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악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사람에 대해서 성경적인 관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배’를 아무리 드려도 거룩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어주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큰 자비를 볼 때, 마땅한 반응은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어떤 성질의 것입니까? 특정한 신분을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주일 뿐 아니라 주중에도, 예배당에서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동물을 가지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소극적으로는 이 세상의 가치관을 본받지 말아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성령과 성경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고, 바랄 수 있는 성경적인 세계관이 세워져서 우리가 변화되어야,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007년 하반기에 기독로펌의 논의를 계속해나갈 텐데, 우리가 꿈꾸는 기독로펌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CLF 뉴스레터 (0712-2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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