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영성, 보냄 받은 공동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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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bversive Community>

뭐라고 번역할 수 있을 지 어려운 말입니다. "전복(顚覆)적인 공동체"라고 말하자니 좀 미숙한 데가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저 "변혁하는 공동체" 정도로 번역하면 좋을 듯 합니다. 그 원래의 뜻은 기초로부터 완전히 뒤엎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최근 제가 읽은 글 중에 가슴을 찌르는 글 속에서 이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성장 이론에 근거해서 "비젼을 단순화"하고 "동질그룹에 타겟을 맞추어서" "엄청난 인력과 재원과 전략"을 투여해서 사람들을 특정한 장소에 정기적으로 모이도록 애쓰는 교회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제안하는 글이었습니다. 이런 모임, 이런 공동체는 도피적인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삶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살도록 만드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3p로 특징지을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prayer, parable(story), 그리고 party가 살아 있는 공동체가 바로 subversive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프로그램을 축복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는 대신에 그분의 프로그램을 이루어 가시도록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구하고 기다리는" 것이 기도의 특징입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분의 이야기 속에서 서로 나누는 공동체, 단순한 이론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늘 파티를 행하셨듯이 이 공동체는 파티를 아는 공동체입니다. 즐거움과 놀라움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가 우리 모임이, 그리고 우리를 통해 우리들이 속한 모임들이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1391(일,삶,구원) 지성근 목사 2002.6.20.

* 풀다리草梁통신은 지성근 목사가 일상생활의 영성과 보냄받은 공동체에 대하여 과거에 쓴 글들을 다시 나누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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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죄로 고소당하다>

 

마치 빨래와 밥해줄 것을 바라고 마누라를 얻었는데 알고 보니 인생 전부를 요구하는 것에 정신이 화들짝 든 어리석은 남편처럼 예수님을 나의 입맛에 맞는 구세주로 받아들였으나 그분은 우리 인생 전부를 요구하니 죽을 요량이다. 이 분 몰래 숨겨둔 정부들이 많다. 교회에서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야 이 분이 최고의 남편이요, 최고의 충성의 대상이며, 이 분을 칭송하는 데 입에 침도 바르지 않지만, 직장에 가면, 친구들과 만나서 오락을 즐길 때는, 돈을 쓰는 일에 있어서는 이 분이 원하는 원칙이 아닌 다른 원칙이 더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간음죄로 고소당했다. "나는 그런 적 없는데요! 언제나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고 있고 밥 먹을 때 쪽팔림을 무릅쓰고 기도하고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잘하고 기관에서 활동도 잘하고... 흑흑흑..." 이러다가 또 이렇게 말한다. "제발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이 곤경에서 구해 주세요." 그래도 이 분은 내 속을 다 들여다 보듯이 말씀하신다. "내가 니 속을 다 안다. 니가 지금 그래도 네 마음을 바꾼 적이 없다."

 

놀랐습니까? 예레미야 220절에서 35절까지에서 발견한 말씀을 풀어 써 보았습니다. 요즘 아침 묵상 시간에 호세아서를 묵상하는 데 아시다시피 우리는 고멜과 같은 자들이라는 고백밖에 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이 간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교회에서만 사랑하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높여 드릴 뿐, 다른 영역에서는 그를 우리의 남편으로 주인으로 인정하기를 부끄러워 하거나 심지어 다른 의지의 대상을 찾는 바로 그것이 간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삶, 우리의 주일 뿐 아니라 평일에서도 특별한 관계를 가지시길 원하시는 데 그저 주일만 특별한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것 이것이 간음입니다.

 

월요입입니다. 하나님께 월요일이 왔음을 감사하며 시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일 만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 없이 평일을 살겠습니까?

 

1391(,,구원) 지성근 목사 200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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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기도, 그리고 일상생활>

 

일상생활에 대한 강조가 중요하다. 일상생활의 신학이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의식화작업과 데모모임인 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벌이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이 어떻게 이 세상을 좇아 사는 것과 구별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을 긍정하고 먹는 것, 마시는 것, 사귀는 것 등등을 그저 긍정만 하면 일상생활의 영성, 일상생활의 신학을 하는 것인가? 이 지점에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인간에 제한하시고, 끊임없이 아버지와 대화하시며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사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를 세상을 좇아 사는 삶과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교제와 이 능력입음으로 가능한 것이므로...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충만을 갈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누누이 식사시간을 활용한 성령충만의 갈구훈련(식사시간마다 성령충만을 구하는 훈련)을 주장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이 연사 힘차게 외치는 바이다.

 

1391(,,구원) 지성근 목사 200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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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물을 마시려고 합니까?>

물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성경신학적 개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흐르는 강으로부터 시작해서 새하늘과 새땅의 생명수 강에 이르기까지 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도구입니다. 광야시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보좌에서 흐르는 물은 닿는 곳마다 생물들을 살아나게 하는 물이었습니다. 

물은 농경과 목축경제력의 핵심적인 자원이었기에 경제적인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또한 물은 이런 경제력에 근거한 문화와 문명의 발달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문명과 정치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어떤 문명의 영향력하에 있을 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거대한 물을 제공받을 수 있는 대 운하가 없는 가나안땅의 삶은 그야말로 믿음을 요구하는 삶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물리적인 "물"을 넘어서는 생명을 주는 물인 자신을 의지하라고 이야기하시지만 이런 요청을 마다하고 자기 스스로 우물을 파거나 혹은 대운하를 가진 문명국가들에 빌붙으려는 노력을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사람들이 했다고 예레미야서는 말합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렘2:13)",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며 또 그 하수를 마시려고 앗수르 길에 있음은 어찜이뇨.(렘2:18)" 

여러분은 무슨 물을 마시고 살고 있습니까? 교회와 그와 관련된 곳에서는 생수를 찾지만 나머지 정치(권력의 문제), 경제(돈의 문제), 문화의 영역에서는 그 영역의 최고에 빌붙으려 하거나 혹은 자신의 구덩이를 파고 있지는 않는지요? 초막절 끝날에 예수께서 외치신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1391(일,삶,구원) 지성근 목사 200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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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질문들>

일전에 읽었던 두 권의 책은 우리 인생과 삶에 중요한 세가지 질문들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한 권은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IVP, 1998)]인데 거기에서 윌리엄 딜은 평일을 사는 제사장들에게 항상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합니다. 

1.당신은 무슨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2.그 일을 하면서 직면하는 어려운 결정사항과 문제들은 무엇입니까? 
3.그러한 문제와 결정사항과 당신의 신앙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p.241-2) 

또 한 권의 책은 [영적 멘토링(IVP, 2001)]인데 키이슨 앤더슨은 여기에서 영적멘토가 멘티에게 던지는 질문 세 가지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즉 친구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때 도울 수 있는 세 가지 중요 주제라고 할 수 있겠죠. 

1.하나님은 누구신가? 
2.나는 누구인가? 
3.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1번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고, 2번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궁극적인 정체성을 의미하고, 3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책임을 위한 음성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p.34)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 좋은 대답을 얻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것 잘 아시죠? 좋은 질문들은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1391일.삶.구원. 지성근 목사. 200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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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되기>

주님의 지상명령을 우리는 제자삼는 사역으로 이해하고 있고 성도는 그가 있는 영역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소위 "영적 재생산"이 그 핵심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직장에서, 이웃간에, 혹은 교회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최종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명령도 이 지상명령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제자삼는 것을 얼마전까지는 일반적으로 매우 이성적인 방법의 "가르침"과 "배움"으로만 이해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의 핵심은 "친구만들기"였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4).

친구는 갑자기 인스탄트 커피처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친구는 이성적인 작업으로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communication한다. 친구는 "사랑"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친구만들기"를 하자. 직장에서, 이웃에서, 교회에서 친구를 만들고 친구가 되어주자. 이것이 제대로 된 "제자삼기"가 될 것이다. 모더니즘의 제자훈련이 가져다 준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방식, 아니 원조적 방식의 제자삼기를 시도해 보자. 

오늘도 내일도 좋은 친구가 되는 매일이 되길... 

1391일.삶.구원. 지성근 목사. 200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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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 말씀묵상 참된 개혁의 조건 =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깊은 존재의 변화>

 

제사장 여호야다의 후견속에서 성전을 수리하는 열정을 보이던 요아스왕이 여호야다가 사라지자 아마도 그동안의 개혁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관리들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이내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것에 대해 지적하던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여 버리고 만다. 결국 요아스의 초기 선정에도 불구하고 적은수의 아람둔대에 패하고 쿠데타 반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결국은 열왕의 묘실에도 묻히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무엇이 요아스의 운명을 바꾸어 버렸던 것인가? 결국 요아스의 삶에는 제사장 여호야다 한사람의 존재가 엄청난 것이었다. 말씀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실재와 마음을 보여주었던 여호야다의 멘토링이 수다한 사람들의 다수결적 조언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다.

 

개혁의 성공은 한세대를 넘기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반드시 개혁의 반대세력이 있어 물꼬를 다른 길로 돌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 때문이다. 분위기에 편승한 개혁운동은 반드시 이런 반대세력의 상승분위기앞에 넘어지고 말 것이다. 심지어 말씀에 입각했던 개혁운동조차도...

 

처음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고 끝도 중요하다. 게다가 이런 단선적 이해를 넘어서서 심층적 이해도 필요하다. 겉으로는 개혁적이 될 수 있으나 깊은 존재의 변화가 없이도 분위기때문에 개혁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 반드시 반개혁적 분위기를 당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캠퍼스시절의 복음의 열정과 그 이후의 변절(?)도 이런 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멘토가 있어도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훈련없이는 올바르게 설 수 없다. 여호야다같은 좋은 멘토를 만나는 것도 축복이지만 그 멘토없이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진짜 축복이다. 내 인생의 끝까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살 수 있기를 소원한다.

 

1391..구원. 지성근 목사. 200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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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lon Captivity와 주되심>

예레미야서를 연구하고 설교하면서 묵상한 내용입니다. 

예레미야서를 통해 유다 민족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어떻게 열국(All Nations)을 위한 선지자가 되는지를 볼 수 있는데, 이 하나님의 백성과 열국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이 생깁니다. 열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자동적으로 해외선교적인 마인드, 즉 우리 나라가 아닌 이방민족들을 연상하기 쉬운데, 여기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 유다 족속을 "교회"에 유비하자면 교회 안에서만 구원을 이야기하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그 안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던 데서 이제는 열국, 즉 "세상" 안에서 구원과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어쩌면 "바벨론 유수(포로)"가 한 편으로는 위기이고 재앙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각을 열어 "온 세상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드디어 알고 깨닫게 하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간혹 직장과 세상 속, 혹은 세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Babylon Captivity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일 외의 삶에서는 마치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사는 것처럼 마지 못해 사는 삶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관점의 변화가 이 지점에서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주님은, 바벨론 유수 같은 세속 안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을 발견하고 그것에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지요. 

직장에서 신우회로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직장생활 그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복음과 구원이 우리의 삶을 철저히 지배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 1391(일삶구원) 지성근 목사 200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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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ank God, It's Monday! >

야! 월요일이다!

월요일을 이런 탄성으로 시작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쉬운 일이 아닌 줄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치 "주일"을 맞을 때 우리의 감정과는 좀 맞지 않더라고 의식적으로 경축의 마음을 가지듯이 하나님이 주신 평일을 "경축"하는 마음으로,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도록 의지를 발휘하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월요병이라는 조어가 말해주듯이 병든 병아리처럼 월요일을 맞기 때문에, 더욱더 주의 헌신된 청년, 백성들로서는 문화를 거슬러서, 대세를 거슬러서 대안적인 생각과 대안적인 몸짓을 좀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윌리엄 딜의 책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IVP)에서 저자는 정사와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우리의 평일의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울부짖는 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냥 수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일부러 옆사람에게 평일이 되어서 너무 좋다고 해 봅시다. Thank God, It's Monday! 

- 1391(일삶구원) 지성근 목사 20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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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것의 영성 >

우리들은 참 작은 것에 기뻐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지하철에 앉아서 자리 하나 차지 하는 것 하나에 표정이 바뀌고 기분이 달라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하는 것을 보며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실은 우리 삶을 좌지우지 한다는 생각이지요. 

'영적인 삶'하면 우리는 큰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부흥이라든지 능력에 대한 사모라든지 하는 것이 작은 것에 대한 기대보다는 큰 것에 대한 기대와 연결되어 있는 경향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큰 것과 연결되어 지지 않으면 신통치 않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우리들의 영성에의 추구도 큰 것에만 집중되어 버리곤 합니다. '큰' 변화, '큰' 성장이 우리의 담론이 되어 버렸습니다. 국가단위의 고민, 하나님 나라단위의 사색, 거창한 영적 부담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작은 것들이라면 작은 것들속에서 영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작은 일상들, 허드렛 일들(chores)을 하면서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심"을 의식하며, 작은 관계들속에서 "성령충만"을 드러내며 사는 삶, 그것이 영적 허구가 아닌 영적 실재 일 것입니다. 

오늘도 작은 것의 영성을 고민하며 작은 것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 1391(일삶구원) 지성근 목사 2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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